윌슨오브틸리언 남작 데이비드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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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비드 윌슨 오브 틸리언 남작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외교관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1987년부터 1992년까지 홍콩 총독을 역임했으며, 1984년 홍콩 반환에 관한 중영 공동 선언의 실무 그룹 영국 측 수장, 중영 연합 연락 소조의 초대 영국 수석 대표를 지냈다. 윌슨은 홍콩 총독 재임 기간 동안 블랙 먼데이, 톈안먼 광장 시위, 베트남 난민 문제 등 여러 현안에 직면했으며, 홍콩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총독 퇴임 후에는 귀족 작위를 받고, 여러 학술 및 공공 기관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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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엘리엇은 영국 해군 복무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영국령 기아나 노예보호관, 청나라 선무총관 등을 역임했고, 아편전쟁 당시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하는 조약을 체결했으나 해임된 인물이다.
윌슨오브틸리언 남작 데이비드 윌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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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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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더 라이트 오너러블 |
이름 | 틸리욘 남작 윌슨 경 |
출생명 | 데이비드 클라이브 윌슨 |
출생일 | 1935년 2월 14일 |
출생지 | 스코틀랜드, 클라크매넌셔, 앨러웨이 |
국적 | 영국 |
자녀 | 외 1명 |
모교 | 키블 칼리지 (옥스포드 대학교) (석사) 런던 대학교 (박사) 홍콩 대학교 (졸업) |
직업 | 식민지 총독, 외교관, 중국 학자 |
홍콩 총독 재임 | |
직위 | [[파일:Flag_of_the_Governor_of_Hong_Kong_(1959-1997).svg|25px]] 제27대 총독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임기 시작 | 1987년 4월 9일 |
임기 종료 | 1992년 7월 3일 |
후임 | 크리스토퍼 패튼 |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고등 판무관 | |
직위 | [[파일:Royal_Banner_of_Scotland.svg|25px]] |
임기 시작 | 2010년 4월 11일 |
임기 종료 | 2011년 7월 20일 |
에든버러 왕립 학회 회장 | |
직위 | 회장 |
임기 시작 | 2008년 9월 3일 |
임기 종료 | 2011년 7월 4일 |
전임 | 마이클 아티야 |
영국 귀족원 의원 | |
직위 | 영국 귀족원 의원, 세속 귀족, 종신 |
임기 시작 | 1992년 7월 15일 |
학문 경력 | |
직위 | 애버딘 대학교 총장 |
임기 시작 | 1997년 6월 6일 |
임기 종료 | 2013년 1월 6일 |
전임 | Kenneth Alexander |
후임 | 커밀라 (영국 왕비) |
직위 | 케임브리지 대학교 Master |
임기 시작 | 2002년 1월 1일 |
임기 종료 | 2008년 3월 3일 |
2. 초기 생애 및 경력
데이비드 윌슨은 1935년 스코틀랜드 알로아에서 태어나 글렌알몬드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키블 칼리지, 런던 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연구원 등에서 교육을 받았다.[1][15] 홍콩 대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한 후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으며, 베이징어에 능통했다.[1][15] 잠시 외무·영연방성을 떠나 학술지 ''차이나 쿼털리'' 편집을 맡기도 했으나, 1974년 외교부에 복귀했다.[1][15] 이후 홍콩 총독의 정치 고문, 외무부 남유럽 부서장, 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등을 역임하며 홍콩 반환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1][15] 특히 1984년 홍콩 반환에 관한 중영 공동 선언 초안 작성 실무 그룹의 영국 측 수장을 맡았고, 중영 연합 연락 소조의 초대 영국 수석 대표로 활동했다.[1][15] 1986년 에드워드 유드 총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1987년 홍콩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15]
2. 1. 교육 및 외교 경력
1935년 2월 14일 스코틀랜드 알로아에서 태어났다.[1] 글렌알몬드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키블 칼리지(1955–58, 문학 석사), 런던 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연구원(1973년 현대 중국사 박사)에서 교육을 받았다.[1] 그는 1960년부터 1962년까지 홍콩 대학교에서 중국어를 공부했으며, 이후 베이징 주재 영국 대표부에서 근무했다.[1] 베이징어에 능통하며 기본적인 광둥어도 습득했고, 외교관으로 보낸 30년 중 10년을 중국에서 보냈다.[1]1968년, 윌슨은 외무·영연방성에서 사임하고 동양 아프리카 연구원에서 ''차이나 쿼털리''의 편집을 맡았다.[1] 1974년 외교부에 재합류한 후 내각부에서 근무했으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당시 홍콩 총독이었던 크로퍼드 머레이 맥레호스의 정치 고문으로 활동했다.[1] 그 후 그는 외무·영연방성 남유럽 부서의 수장이 되었고, 아시아 및 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역임하면서 1984년 홍콩 반환에 관한 중영 공동 선언을 초안하는 실무 그룹의 영국 측 수장이었다.[1] 1984년에는 공동 선언에 따라 설립된 중영 연합 연락 소조의 초대 영국 수석 대표가 되었다.[1] 에드워드 유드가 1986년 12월 5일 베이징에서 사망하자 윌슨은 그를 대신하여 1987년 4월 9일 홍콩 총독이 되었다.[1]
2. 2. 외교부 복귀 및 홍콩 관련 활동
1968년, 윌슨은 외무·영연방부를 잠시 떠나 런던 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연구 대학원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차이나 쿼털리''의 편집을 맡았다.[1][15] 이후 1974년 다시 외교부에 복귀하여 내각부에서 근무했다.[1][15]1977년부터 1981년까지는 당시 홍콩 총독이었던 머레이 매클레호스 경의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며 홍콩 문제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1][15] 그 후 외무부로 돌아와 남유럽 부서의 책임자를 맡았고, 이어서 아시아 및 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역임했다.[1][15] 차관보 시절인 1984년에는 홍콩 반환의 기초가 된 중영 공동 선언을 초안하는 실무 그룹의 영국 측 수장을 맡았으며, 공동 선언에 따라 설립된 중영 연합 연락 소조(中英聯合聯絡小組)의 초대 영국 수석 대표로 임명되어 홍콩 반환 과정의 실무를 담당했다.[1][15]
1986년 12월 5일, 에드워드 유드 경이 베이징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윌슨은 그의 뒤를 이어 1987년 4월 9일 제27대 홍콩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15]
3. 홍콩 총독 시절 (1987-1992)
데이비드 윌슨은 1987년부터 1992년까지 홍콩 총독으로 재임하며 여러 주요 사건을 겪었다. 임기 중 1987년 블랙 먼데이와 1989년 톈안먼 광장 시위의 여파에 대처했으며, 심화되던 베트남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해 1988년 강제 송환 정책을 도입했다. 또한, 카이탁 공항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란타우 섬에 신공항을 건설하는 로즈 가든 프로젝트를 1989년 발표했다.
윌슨 총독은 재임 중 사법 체계 내 신체형을 용인하여 비판받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홍콩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는 가운데, 1991년 첫 홍콩 입법회 직접 선거가 치러졌고 민주 진영이 압승했다. 그러나 윌슨의 소극적인 민주화 개혁에 대한 비판 속에 영국 정부는 1991년 12월 그의 교체를 발표했다.[2]
윌슨은 1992년 6월 임기를 마치고 홍콩을 떠났으며, 퇴임 직전 직접 선출 의석을 18석으로 늘리는 개혁안을 시행했다. 후임으로는 크리스 패튼이 임명되었다.[3]
3. 1. 주요 사건 및 정책
총독으로서 윌슨은 임기 초 1987년 블랙 먼데이로 인한 홍콩의 경제적 여파를 수습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홍콩 증권 거래소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1989년 베이징에서 발생한 톈안먼 광장 시위는 홍콩 사회에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윌슨은 이 사건의 여파에도 대처해야 했다.
또한, 그는 꾸준히 악화되던 베트남 난민 문제에 직면했다. 결국 1988년,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이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경제 및 사회 인프라 측면에서는, 1989년 10월 연례 정책 연설을 통해 란타우 섬에 새로운 공항을 건설하는 로즈 가든 프로젝트(홍콩 국제공항 건설 계획)를 발표했다. 이는 기존의 카이탁 공항이 늘어나는 항공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윌슨은 1990년 16세 소년에게 곤장 12대를 선고하는 등 홍콩 사법 체계 내 신체형의 존치를 용인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형벌은 수형자의 신체에 영구적인 상처를 남겼다.
정치적으로는 홍콩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1991년 9월, 홍콩 역사상 처음으로 입법회 의원 일부를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1991년 홍콩 입법회 선거가 치러졌는데, 이 선거에서 민주화 지지 진영이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윌슨 총독의 정책은 민주화 진영으로부터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선거 3개월 뒤인 1991년 12월 영국 정부는 윌슨의 총독 교체를 발표했다.[2]
윌슨은 5년 임기를 마치고 1992년 6월 홍콩을 떠났다. 퇴임 직전에는 홍콩 시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입법회 의석을 18석으로 늘리는 정치 개혁안을 시행하여 제한적이나마 민주주의 확대의 길을 열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당시 영국 총리 존 메이저의 정치적 동맹이자 보수당 의장이었으나, 1992년 영국 총선에서 패배한 전 국회의원 크리스 패튼이 임명되었다.[3]
3. 2. 중국식 이름 변경
윌슨은 홍콩 대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울 때 중국식 이름인 웨이 더웨이(魏德巍, 광둥어: Ngai6 Dak1-ngai4)를 받았다. 성씨 '웨이(魏)'는 '윌슨(Wilson)'에서 따왔고, '더웨이(德巍)'는 '데이비드(David)'를 중국어로 옮긴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가 홍콩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이 이름의 광둥어 발음이 실제 영어 이름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 지적되었다.[4][17]뉴욕 타임스의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윌슨의 이전 중국식 이름이 광둥어로 "위험할 정도로 위선적(偽得危)"이라는 문구와 발음이 유사하게 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성씨인 '웨이(魏)' 자와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웨이(巍)' 자를 파자(破字)하면 각각 '1,800명의 여자 귀신(千八女鬼)'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4][17] 홍콩 라디오 텔레비전의 찬충쾅(Chan Chung-kwong)에 따르면, 일부 홍콩 현지인들은 이 이름을 "두 귀신이 문을 두드린다(雙鬼拍門)"는 의미로 받아들였으며, 이는 총독의 이름으로는 불길하고 부적절하다고 여겨졌다.[5][18]
결국 윌슨은 홍콩 총독으로 취임하면서 중국식 이름을 웨이 익순(衛奕信, 광둥어: Wai Yik-Shun)으로 변경했다. 이 새로운 이름은 광둥어 발음이 그의 영어 이름과 더 유사할 뿐만 아니라, 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길한 숫자로 여겨지는 33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5][18]
3. 3. 평가 및 논란
총독으로서 윌슨은 블랙 먼데이로 인한 홍콩의 여파를 처리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홍콩 증권 거래소는 1989년 베이징에서 일어난 톈안먼 광장 시위와 함께 금융 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그는 또한 베트남 난민 문제에 직면했는데, 이 문제는 꾸준히 악화되어 난민 지위 자격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사람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1988년 정책으로 이어졌다. 1989년 10월 윌슨은 연례 총독 정책 연설에서 란타우 섬에 로즈 가든 프로젝트(玫瑰園計劃, 홍콩 국제공항 참조)로 알려진 공항 건설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홍콩 항공의 시작부터 사용되어 온 카이탁 공항이 현대 항공의 요구를 처리할 수 없다는 우려에서 비롯되었다.
윌슨은 홍콩 민주파로부터, 입법회 의원 전원이 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되도록 조속히 대응하지 않은 점, 선거로 선출되는 의석수를 늘리는 노력을 협의하는 동안 중국 정부의 태도만을 주시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또한, 윌슨은 1990년 16세 소년에게 가해진 곤장 12대 등 홍콩 사법에서 신체형 사용을 용인했다.
1991년 12월, 영국 정부는 홍콩 입법회에서 첫 직접 선거에서 민주 진영이 압승을 거둔 지 3개월 만에, 홍콩의 친민주 진영으로부터 널리 비판받던 윌슨을 총독에서 해임한다고 발표했다.[2] 윌슨은 총독 임기 5년을 마치고 1992년 6월 홍콩을 떠났다. 윌슨은 퇴임 전에 홍콩 시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입법회 의원 18명의 길을 열어주는 정치 개혁을 시작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당시 영국 총리 존 메이저의 보수당 동맹이자 보수당 의장으로 승진했으며, 임명 전에 총선에서 최근 패배한 전 국회의원인 크리스 패튼이었다.[3]
윌슨은 2014년 홍콩 시위 당시 홍콩 경찰을 옹호하며, 경찰의 조치가 "대체로 비례적"이라고 주장했다.[11] 2019년 홍콩 시위 동안 그는 영국 정부의 개입에 반대하며, 상원 연설에서 "우리는 홍콩 정부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시위가 "평화롭게 시작"되었으며 "분명히 선의를 가지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다수의 젊은이들"이 참여했지만, 폭력이 증가했다고 믿었다. 그는 이 사건에서 경찰의 잔혹 행위는 시정되어야 하지만, "경찰이 매주, 주말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도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12]
4. 총독 퇴임 후 활동
홍콩 총독 임기를 마친 후, 1992년 세습 귀족 작위인 '''틸리언 남작'''에 서임되었다.[6][20] 이 작위는 스코틀랜드 애버딘셔의 핀젠(Finzean)과 홍콩의 판링(Fanling)을 지역 기반으로 한다.[7][19]
퇴임 이후 에너지 기업 회장, 영국 문화원 이사, 대학 총장, 박물관 이사장 등 다양한 공공 및 학술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활동 중 2000년에는 스코틀랜드 최고 훈장인 시슬 훈장을 수훈했다. 그는 2014년 상원 개혁법 조항에 따라 2021년 2월 12일부로 상원에서 은퇴했다.[10]
4. 1. 학술 및 공공 활동
홍콩 총독 임기를 마친 후, 1992년 세습 귀족 작위인 '''틸리언 남작'''(영어: Baron Wilson of Tillyorn)에 서임되었다.[6][20] 이 작위는 스코틀랜드 애버딘셔의 핀젠(Finzean)과 홍콩의 판링(Fanling)을 지역 기반으로 한다.[7][19]작위 수여 이후 다양한 학술 및 공공 분야에서 활동했다.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스코틀랜드 퍼스에 본사를 둔 에너지 회사 스코티시 하이드로 일렉트릭(Scottish Hydro Electric plc, 후에 스코티시 앤 사던 에너지로 변경)의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993년부터 2002년까지 영국 문화원의 이사이자 스코틀랜드 위원회 의장을 맡았으며, 같은 기간 동안 마틴 커리 퍼시픽 트러스트(Martin Currie Pacific Trust)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1993년부터 2008년까지는 영국-부탄 협회(Britain–Bhutan Society) 회장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홍콩 협회(Hong Kong Association) 회장을 맡고 있다. 1996년에는 왕립 스코틀랜드 지리학회(Royal Scottish Geographical Society)의 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학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97년부터 2013년까지 애버딘 대학교(University of Aberdeen) 총장을 역임했으며, 후임으로는 로테세이 공작 부인 카밀라가 취임했다.[8][21] 2002년부터 2008년까지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터하우스(Peterhouse, Cambridge)의 마스터(Master)를 지냈다.
2000년에는 스코틀랜드 최고 훈장인 시슬 훈장(Order of the Thistle)을 수훈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는 스코틀랜드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s Scotland)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2008년 10월부터 2011년 10월까지는 에든버러 왕립 학회(Royal Society of Edinburgh) 회장을 맡았으며, 후임으로는 존 아버스노트 경(Sir John Arbuthnott)이 취임했다.[9][22] 2010년 1월에는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의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고등 판무관(Lord High Commissioner to the General Assembly of the Church of Scotland)으로 임명되었다.
윌슨 남작은 의회 서기(Clerk of the Parliaments)에게 상원 개혁법 2014(House of Lords Reform Act 2014) 조항에 따라 2021년 2월 12일부로 상원에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10]
4. 2. 홍콩 관련 활동 및 입장
홍콩 총독으로서 윌슨은 1987년 블랙 먼데이가 홍콩에 미친 경제적 여파를 수습해야 했다. 이 사건은 홍콩 증권 거래소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후 1989년 베이징에서 발생한 톈안먼 광장 시위 역시 홍콩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베트남 난민 문제에도 직면했는데, 상황이 악화되면서 1988년에는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이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1989년 10월, 윌슨은 연례 정책 연설에서 란타우 섬에 새로운 공항을 건설하는 로즈 가든 프로젝트(玫瑰園計劃, 홍콩 국제공항 참조)를 제안했다. 이는 기존의 카이탁 공항이 늘어나는 항공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1991년 12월, 영국 정부는 윌슨을 총독직에서 해임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홍콩 입법회에서 첫 직접 선거가 치러진 지 불과 3개월 만의 일이었으며, 당시 선거에서는 민주파가 압승을 거둔 바 있다. 윌슨은 임기 동안 홍콩 시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입법회 의원 18석을 도입하는 정치 개혁을 시작했지만, 민주주의 확대 속도가 느리다는 점에서 홍콩의 민주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2] 그는 5년 임기를 마치고 1992년 6월 홍콩을 떠났다.
윌슨의 후임으로는 당시 영국 총리 존 메이저의 정치적 동맹이자 보수당 의장이었던 크리스 패튼이 임명되었다. 패튼은 총독 임명 직전 총선에서 패배한 상태였다.[3]
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윌슨은 1992년 세습 귀족 작위를 받아 '''틸리언 남작'''이 되었다.[6][7][19][20] 이후 그는 홍콩 협회(1994– ) 회장 등을 역임했다. 홍콩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것들이 있는데, 총 길이 78km의 하이킹 코스인 윌슨 트레일과 1992년 12월 홍콩 문화 유산 보존을 위해 설립된 윌슨 남작 유산 신탁(衛奕信勳爵文物信託)이 대표적이다.
윌슨은 홍콩의 민주화 시위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2014년 홍콩 시위 당시 그는 홍콩 경찰의 대응을 옹호하며 "대체로 비례적"이었다고 평가했다.[11] 2019년 홍콩 시위 중에는 영국 정부의 개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상원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홍콩 정부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위가 "평화롭게 시작"되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다수의 젊은이들"이 참여했지만, 점차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언급했다. 또한 경찰의 과잉 진압 문제는 시정되어야 하지만, "경찰이 매주, 주말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도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12]
이러한 그의 행보와 발언은 홍콩의 민주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특히 보편적 선거권에 기반한 완전한 직선제 입법부 도입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고, 1997년 주권 반환 전후의 정치 개혁 과정에서 중국 정부의 입장을 지나치게 고려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5. 사생활
1967년 버나드 구스타브 알렉산더의 딸인 나타샤 헬렌 메리 알렉산더와 결혼했다. 슬하에 두 아들, 피터와 앤드루를 두었다.
6. 수상 및 영예
7. 작위 및 칭호
- 데이비드 클라이브 윌슨 씨 (1937–1972)
- 데이비드 클라이브 윌슨 박사 (1972–1987)
- "각하" 데이비드 클라이브 윌슨 경, K.C.M.G. (1991년 G.C.M.G.로 승급) (1987–1992)
- "Rt Hon." 윌슨 오브 틸리언 남작, G.C.M.G. (1992–2000)
- "Rt Hon." 윌슨 오브 틸리언 남작, K.T., G.C.M.G. (2000–현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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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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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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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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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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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hina, the right name can mean the good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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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 Kong Volume 800: debated on Thursday 24 Octob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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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to the Hong Kong Basic Law
Hong Kong University Pres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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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In China, the right name can mean the good life
https://www.nytimes.[...]
1987-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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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也談郝德傑
http://app3.rthk.org[...]
2010-06-20
[19]
뉴스
London Gazette
1992-02-19
[20]
뉴스
Ally of Major Is Named Hong Kong Governor
https://www.nytimes.[...]
1992-04-26
[21]
웹사이트
HRH The Duchess of Rothesay joins University 'family'
http://www.abdn.ac.u[...]
University of Aberdeen
[22]
웹사이트
Presidents
http://www.rse.org.u[...]
Royal Society of Edinbur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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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London Gazette
2000-12-15
[24]
뉴스
London Gazette
1990-12-28
[25]
웹사이트
http://www.cracrof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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